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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과 생각들

40대 중반에 퇴사할 결심

by chongdowon 2024.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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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대학졸업까지
사람은 본인 의지로 태어나지는 않지만 살면서는 스스로의 의지로 여러가지 결정을 해야하는 순간이 온다. 결정은 앞날을 좌우하게 되고 그 결과에 따라서 희비가 엇갈릴 수 있다. 나처럼 우리나라 같은 선진국에 중위소득의 집안에 태어나면 대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큰 고민을 할 여유가 없다. 그저 공교육의 틀을 쓴 입시라는 제도 안에서 대학진학을 위해서 발버둥을 칠 뿐이다. 대학에 진학하고 나면 대부분은 동시에 성인이 되기 때문에 본인의 결정이 법적인 책임도 동반하게 된다. 어떤 수업을 들을지 어떤 진로로 갈지 결정하고 거기에 맞춰 학점, 언어, 외부 경험 등을 준비해야 한다. 물론 이조차도 가정이라는 집단에서 충분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경우이고 그렇지 않으면 재원 마련을 위해 일을 해야할수도 있고,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할수도 있다. 이 또한 학업에 영향을 주거나 사회에 진출해서 발목을 잡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판단은 본인의 몫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또다른 선택지들이 있는데 나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석사를 마쳤고 곧바로 취업을 했다. 크게 고민은 하지 않았는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충분한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취업은 쉽게 했다. 대졸초임연봉이 얼마이고 직장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더이상 집에서 지원받기가 힘들고 석사의 다음 단계인 박사과정을 할 의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한 직장이 2년이 되자 엄청난 회의감을 느끼게 되었다. 매우 취약한 비지니스 모델을 가지고 있는 컨설팅사업의 한계가 첫번째였고, 당시에 맞물린 정치적 상황이 두번째 문제였다. 그리고 세번째 문제는 농산업이라는 산업 자체의 한계도 있었다. 결국 정리하기로 마음먹었고 다행히 회사에 잘 다니던 아내도 함께 퇴사를 해 주어 용기를 내고 새로운 인생에 도전하게 되었다.
캄보디아가 처음은 아니었다. 학부에 다니는 동안 코이카를 통해서 봉사단 경험이 있었고, 또 그런 경험과 전공이 맞물려 캄보디아농업연구소에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내 능력이 부족하고 체계적인 봉사단프로그램이 없는 상태에서 1년 동안 시간을 허비했다. 생각해보면 그 시간동안 많은 캄보디아 농업에 대해 많은 조사와 공부를 하긴 했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다음 직장에 대해서 고민하지는 않았다. 학부를 졸업하기 전까지와 크게 다를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저 앉은 자리에서 혹은 생활반경에서 머지 않은 곳에서만 활동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이건 물리적 거리를 뜻하는 것은 아니고 관심분야의 문제인데 농업 외적인 영역에서 크게 관심이 없는 것이 장점이면서 큰 단점이기도 하다.
물론 이와중에 농업과 관련된 사업이나 컨설팅을 하려고 몇번 시도는 했지만 수익을 내지는 못했고 인맥만 남게 되었다. 어쨌든 이런 저런 활동을 하면서 1년을 쉬었다. 쉬는 중간중간 돈 안되는 활동 덕분에 코트라프놈펜무역관에서 일하게 되었다. 1년 7개월 정도 일 했는데 생각보다 다양한 경험과 더불어 많은 사람을 만났다. 농산업의 구조적 한계를 다시 한번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해외진출을 추진하는 중소기업들을 보니 농업에서도 또다른 방향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쨌든 프로젝트로 짧게 시작한 일이 길어졌고 정규직 제안도 받았지만 사실상 내가 했던 코트라에서의 작업들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기에 접기로 하고 퇴사 아닌 퇴사를 했다.
다시 1년 휴식을 하게 되었다. 무역관에 있으면서 만났던 기업들이나 사람들을 통해 몇가지 일자리가 있었고 잠시 해 봤지만 역시나 한계가 있어나 농장을 운영하는 회사, 비료회사 등과 일 했는데 영업은 체질에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시장 상황이 지금과 달리 긍정적이지도 않았다. 회사법인이지만 사실상 개인농장에 가까운 대형농장 한 곳은 체계가 없어서 아쉬움만 가득 안고 멀리했다. 전형적으로 체계도 철학도 지식도 없이 큰 꿈만 가지고 투자한 사례였지만 아직도 근근히 버티고 있다. 근근히 버틴다는 말이 긍정적인지 않은 것이 버티는 과정에서 좋지 않은 일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실 무역관을 그만두고 1년을 쉬게 된 더 주된 이유는 그 당시 코이카를 통해 PMC 사업을 하는 업체에 전문가로 참여하기로 돼 있었기 때문인데, 약속된 업무가 진행되지 않게 되고 그 이후로 한동안 코이카 관련 전문가에만 몰입했기 때문에 다른 곳에 취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사실 1년을 채울 때까지 관심이 없기도 했다.
대규모영농 쉬면서 최후의 보루로 남겨뒀던 회사에 연락을 해서 일을 시작했다. 어릴 때 부터 시간의 흐름으로 보면 부모님께 배우면서 직접 농사, 학교에서 이론적 지식 습득, 대학원에서 다시 실습, 취업과 동시에 농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농촌개발이다. 졸업하고 10년이 넘어서 다시 본격적인 농업 현장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7년 10개월 근무를 하면서 중간에 코로나가 2년 껴 있었다. 외부에서는 한국자본의 대형 농장으로 대단히 활성화 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투자 20년차가 되었지만 여러가지 문제들로 인해 회사의 주인이 2번 바뀌고 경영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 상태다. 물론 기본 사업 규모가 있기 때문에 매년 식재하고 수확하는 활동은 이어갔지만 정상적으로 수익이 나는 상황은 아니다. 관련 문제점들은 다른 글에서 여러번 언급했기 때문에 넘어가겠다.
회사는 수익을 내고 직원은 급여를 받고 노동력을 제공한다. 물가는 매년 상승하지만 회사는 적자를 핑계로 임금을 동결한다. 퇴사직원이 늘어나면 남아있는 직원의 업무량은 증가하게 되면서 실질임금은 물가, 업무량과 함께 더욱 감소하게 된다. 이런 문제를 지적하며 개선을 요구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 당했다. 특히 수년째 회사를 매각하려고 하는 상황에서 남아있어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계속 버텼던 것은 매달 안정적으로 나오는 급여가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스스로가 안정을 취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회사가 매각되면 거기에서 1년 더 일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바로 그 점이 잘못된 것이었다. 
침몰 중인 배를 수리해서 같이 계속 항해할 의지가 서로 없으면 배를 빨리 버리는게 맞다. 적어도 경영진이 수리할 의지가 있었으면 더 힘을 냈을 수 있다. 지난 7년간 제안했던 많은 사업들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어쨌든 이와중에 아내가 먼저 퇴사를 했다. 퇴사를 결정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오히려 내가 혼자라도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내 위와 같은 이유로 마음을 바꿨다. 당장은 지금보다 풍요롭지 않고 재취업에 대한 심리적 압박이 있겠지만 이 월급의 달달함게 빠져 있다가는 언제 스스로 개미지옥으로 들어가는지 깨닫지도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완전히 침몰하기 전에 배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40대 중반 퇴사 이후에는 일단 첫번째 하고 싶은 일이었던 유럽여행을 가고자 한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런저런 과정과 인연으로 다시 캄보디아에서 일할 수도 있고 돌고 돌아 다시 한국으로 갈수도 있다. 적어도 다행인 것은 30대 초반에 아무것도 가진게 없던 시절에서 벗어나 집도 있고 당분간은 버틸 수 있는 현금도 있다. 물론 그만큼 지출도 커졌고 불확실성도 커졌기 때문에 어느 순간 조바심은 더 강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모든 갈림길을 지나면 똑같아진다.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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