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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과 생각들

엄마의 달력

by chongdowon 2024.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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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면 달력이나 다이어리를 주고 받는다. 지인 부부에게 다이어리 두 권을 선물했더니 나도 다른 지인으로부터 다이어리 몇 권을 받았다. 요즘 다이어리를 쓸 일이 없어서 거절했더니 어차피 사무실에 남는거라고, 요즘 쓰는 사람도 없다고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집에 가면 큰 숫자에 여백이 많은 달력이 거실 한 켠에 걸려있다. 오래된 집이 혹은 한 사람이 오래 살았던 집들이 대체로 비슷한데 가족들의 돌, 졸업, 결혼 사진이 주렁주렁 가을 감나무 달리 듯이 걸려있다. 그 와중에 흰 여백에 검은 글씨와 파란색의 광고가 있는 (주로) 농협에서 받아 온 달력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다. 본인 말씀에 소녀시절에는 작은 공책에 글도 쓰곤 했다지만 이젠 손바닥에 들어오는 다이어리는 잘 보이지도 않고 글자 적기도 어렵다. 물론 지금보다 훨씬 젊었던 새댁일 때 부터 달력을 애용했다. 집안의 많은 대소사를 적어둬야 할 뿐만 아니라 잊어 먹지 않기 위해서는 눈에 띄는 곳에 붙여둬야했을 것이다.

해가 바뀌기 전에 지금보다 조금 더 이른 12월 초가 되면 새로운 달력을 받아오고 작년 달력에서 복사하듯이 그대로 옮겨 적는다. 특히 양력 기준이 아니라 모든 대소사는 음력을 기준으로 되어 있어서 큰 글씨 아래있는 음력을 하나씩 짝맞춰 옮겨 적는다. 왜 남의 집 제사가 그렇게 많은지 또 본인 자식은 왜 많아서 안 그래도 적을 것 많은 달력에 일거리만 많다. 달력에는 제사와 생일은 기본이고 모내기, 계모임, 추수처럼 일년내내 엄마가 치뤄야 할 모든 일들이 담겨져 있다.

이제는 제사도 줄어들고 생일을 챙겨야 할 사람도 줄어 들었지만 여전히 달력은 거실 항상 그자리에 있다. 달력이 바뀌는 것처럼 들어가고 나오는 대소사도 매년 조금씩 달라진다. 아마 달력이 거실에 있었던 것은 엄마 스스로가 보기 위해서였기도 하겠지만 집을 드나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는 일종의 공지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번달에 제사가 언제인지 가족 누구의 생일이 언제인지 농사일은 언제하는지 굳이 안 물어봐도 알 수 있고, 오다가다 달력을 보면서 다시 상기할 수 있었다. 달력은 엄마가 날짜를 보기 위해서도 중요했지만 내 일정을 가족과 공유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10년은 족히 지난 것 같다. 달력에 써야할 일정이 줄어든 대신 냉장고 옆에 작은 메모판이 붙었다. 여기에는 남들에게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않은 일정들이 있는데 달력에 들어갈 내용처럼 반복적이지는 않지만 단기간 내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적혀있다. 병원에 다녀와서 처방약이 생기면 약을 언제 먹어야할지 약국에서 들은 설명을 큰 글씨로 옮겨 적는다. 내가 가끔씩 집에서 가서 이번에 챙겨 달라고 부탁한 것들을 또 큰 글씨로 적어서 잊지 않게 한다. 달력은 거실에 있어 누구나 볼 수 있지만, 이 메모판은 냉장고 옆에 붙어 있어서 눈 높이가 엄마와 정확히 맞아야 하고 지나가면서 굳이 냉장고의 구석진 한 면을 봐야지만 알아챌 수 있다. 이 메모판은 언제든지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다. 아마 내가 출국하고 나서 지우고 김장 일정을 적었으리라.

그래서 엄마에게 달력은 매년 정보가 업데이트 되는 기억이자 연간 일정이고, 메모판은 중요하지만 더이상 업데이트가 없는 한순간의 일정이다. 다이어리를 쓰지 않아도 글을 따로 써 두지 않아도 엄마는 이미 훌륭한 일정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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