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르다는 착각 우리는 왜 게으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가
데번 프라이스 저/이현 역 | 웨일북 | 2022년 04월 10일 | 원제 : Laziness Does Not Exist
한글제목 보다 영어 원제가 더 적절할 것 같다. 게으름은 없다. 이 책은 경쟁에 내몰린 우리 사회 어른과 학생 모두에게 위안을 준다. 게으름이 나쁘지 않다는 얘기 뿐만 아니라 원인과 해결 방법도 함께 제시한다. 만성적으로 늑장 부리는 사람은 불안함 때문인데, 큰 책임을 작은 과제로 나눠 진행하기를 제안한다. 실재로 일을 하다보면 걱정만 하다가 시일을 놓치는 경우를 보게 된다. 특히 보고서 같은 글을 쓸 때 자주 제안하는 방법이 생각나는대로 목차 쓰기이다. 나도 목차를 써 보고 순서에 상관없이 자료를 조사하면서 글을 쓰곤 한다.
다른 관점의 책 -도둑맞은 집중력-을 보더라도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고 뇌과학을 다룬 책이서도 충분한 수면을 강조한다.
타인의 시선 때문에 높은 성과를 내려고도 한다. 때로는 편견을 줄이기 위해서도 과도한 노력을 한다. 우리나라로 예를 들면 지방대 출신이 뼈를 깍는 노력을 하는 것과 같다. 성과를 위해서 열심히 빨리빨리를 외치지만 음미를 하게 되면 잇점이 많다. 음미하는 시간을 잃게 되면서 생활은 각박해지고 동시에 두어가지 일을 하고 있지만 머릿속이 남는건 없게 된다.
스마트폰을 버리라고 하는 책들은 많은데 이 책은 마냥 스마트폰이 없는 삶이 효율적이지 않다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한다. 다만 휴식을 위해 사용제한을 제안한다. 아울러 스마트워치 같은 건강트래커들 역시 족쇄로 작용한다고 얘기한다.
나이와 사회적 환경의 차이가 있울 수 있는데 나도 3개월 정도 쉬어보니 피곤할 때 보다 맘에 여유가 있을 때 잠이 더 잘 온다. 운동하고 술 마셔도 업무로 긴장할 때는 조급하게 일어나야 하지만, 스스로 옥죄임이 없을 땐 아무때나 잠이 잘 온다.
약간 다른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해가 되는데 예전과 달리 지금은 노숙자 혹은 중산층 이하의 계층의 비만인에 대해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않는다. 좋은 먹거리와 충분한 휴식을 취할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은 사회적인 압박이다. 노숙자들도 자립할 수 있는 거처와 일자리 혹은 기술교육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국가제도의 문제다. 이들은 단순히 게으르다고 질타하는 것은 문제인식을 정확히 하지 않고 해결방안을 바르게 제시하지 않은 것이다.
사회적으로 강박을 갖게 되는 많은 것들 특히 뉴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정보혁명 이전보다 우리가 접해야 할 정보의 양이 비교불가능할 정도로 많아졌다. 하지만 이 정보들은 누구나 습득하고 인지해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런 정보에 대한 집착이 스스로를 나태하다고 평가하게 된다. 특정한 분야의 정보는 전문가에게 맡기면 된다.
같은 맥락에서 이 책을 읽으면서 왜 나는 정보와 지식에 집착을 하고 있는가라는 반성을 하면서 40대 중반이 되면서 서서히 내려놓은 자신을 마주하고 있다. 스스로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순간 경쟁상대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인데, 아마 지난 시간 동안은 외부의 시선과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집착을 했던 것 같다. 물론 내 삶이 여기에서 멈춘게 아니라 앞으로 겪어야 할 예상되는 현실적인 문제들과 상상도 되지 않는 문제들을 마주하겠지만, 어차피 지금 그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은 없다. 오히려 지금 조금 쉬면서 험준한 일이 닥쳤을 때 맞부딪힐 수 있는 용기를 충전하는게 좋지 않을까.
책의 후반부 1/3 정도는 공감이 약한 해결책들을 제시하고 있다. 공감이 많이 되는 앞부분 본문을 일부 인용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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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게으르다고 치부하는 사람은 대개 절대적인 한계에 다다른 사람들이다. 노동이 도덕성을 높인다는 청교도사상은 생산성에 집작하는 기독교로부터 발전해 노예들에게 강요되었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휴식에 대한 욕구가 우리를 형편없는 사람으로 만든다고 설득하려 한다. 게으름을 두려워하기를 멈출 때, 우리는 반성하고 재충전하고, 사랑하는 사름들과 다시 교감하고, 좋아하는 취미를 다시 시작하고, 일부러 느긋한 속도로 세상을 헤쳐 나아갈 시간을 찾을 수 있다. 늑장은 그보다 훨씬 복잡한 형태로, 신경을 너무 많이 쓰고 잘하려는 마음에서 나온다. 표준 주당 근무시간이 40시간이 된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그 이상의 노동은 노동자들이 지쳐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고용주에게 돌아갈 수익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사무직에서 하루 평균 3시간 정도만 생산적일 수 있음을 계속해서 발견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잘 안다'는 것의 기준이 점점 더 높아져서 그 기준을 따라잡기란 무척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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