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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과 생각들

수확과 정산의 계절

by chongdowon 2025.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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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위도 온대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열 두 달이 있는 달력이 익숙하다. 12월은 당연히 추워야 하고 2월이 지나면 따뜻해진다. 음력과도 비슷하게 돌아가서 설날을 기점으로 따뜻해지는게 당연하게 생각된다. 1년은 지구의 자전을 기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남반구나 북반구에서는 달력을 넘기는 것과 날씨가 바뀌는 것이 크게 상관이 없다. 열대몬순기후의 영향을 받는 지역은 건기와 우기에 맞춰서 계절이 바뀐다.

우리나라는 많은 먹거리를 추워지기 전에 수확한다. 과일과 곡식은 봄부터 태양을 받아 충분히 익은 다음 서리와 눈이 내리기 전인 10월에서 11월에 수확을 마친다. 열대 몬순 기후 지역에서는 조금 다른데, 상대적으로 기온이 떨어지는 건기의 시작부에 수확을 한번한다. 그리고 우기의 시작에도 수확을 한번한다. 우기에 비를 맞으며 자란 작물을 건기의 초입에 수확하고, 건조한 땅에서 잘 자란 작물을 비로 인해 침수되지 않게 우기 전에 수확한다.

어쨌든 도시 그리고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일하면서 농사의 절기와 동 떨어져 있는 삶에서 수확은 매달 이뤄지기도 하지만 매년 이뤄지기도 한다. 우리는 매달 30, 31일과 매년 12월 정산을 하게 된다. 어떤 계기가 되든 마침표를 찍는 순간은 매번 반복된다. 마침표를 찍는 행위가 농부의 수확처럼 온전한 결과라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행위를 통해 얻는 안식은 가을걷이를 끝내고 뜨뜻한 구들방에 앉아 있는 농부의 마음과 같을 것이다.

십 여년의 캄보디아 생활을 마치고 베트남에 오면서 마침표를 찍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이전의 생활과 현재의 생활은 이어질 수 밖에 없기에 내가 찍은 마침표는 쉼표라는 생각을 줄곧했다. 이전의 생활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경력이 되고 그 경력으로 현재의 일상을 시작했기에 쉼표일수밖에 없다. 

베트남에서 6개월의 생활을 마치고 정산할 시기가 도래했다. 당연히 나를 돌아보게 되고 상대방을 바라보게 된다. 자리바뀜이 생기면서 내가 하지 않았거나 하기 싫었던 일은 다시 해야하게 되었고, 오랜 시간 묻어뒀던 나의 즐거움을 꺼낼 수도 있게 되었다. 상황에는 항상 변수가 있지만 모든 변수가 부정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는게 첫번째 소득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할 수 있다는 점을 새삼 배운 것은 두번째 소득이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면 겨울은 반드시 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세번째 소득이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휴식도 함께 온다는 것이 마지막 소득이다. 이 네가지 정산 결과가 올해의 수확이다.

수확을 마치고 만족하는 농부가 있고 만족하지 못하는 농부가 있다. 하지만 내 경험상 적어도 농부들은 욕심내지 않는다. 만족하고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은 올해의 내 노력에 대한 결과물이다. 날씨 때문에 병해충 때문에 혹은 야생동물의 피해로 생각지 못하게 적은 수확을 할 수 있다. 욕심내지 않는다는 것은 남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내 땅에서 기른 수확물은 그걸로 끝이다. 옆의 논과 밭에서 얼마나 더 많이 수확했는지는 비교할 필요가 없다. 혹시 내가 모르는 씨앗과 비료를 썼다면 배워서 다음해 따라해 보면 된다. 농부의 겨울이자 농한기는 그런 의미에서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이다.

올해의 수확이 풍요로울지 아닐지는 모르겠다. 나는 비교하고 비교 당하는 삶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대일로 비교할 대상이 없다는 것은 다행이고, 그래서 앞으로 나에게 주어질 농한기는 그나마 쓸데없는 비교 때문에 고민할 시간을 줄여주고 온전히 재충전할 시간이 될 수 있다.     

다음 해 농사지을 날씨가 좋을지 나쁠지 고민하는 농부는 멍청한 농부다. 다음 해 사용할 종자를 잘 보관하고 퇴비를 열심히 만드는 농부가 현명한 농부다. 농사에서 날씨는 상수고 종자와 비료가 변수다.

올해의 수확과 정산은 대충 마무리 됐으니 이제 잘 휴식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