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항해시대의 동남아시아, 앤서니 리드 지음, 박소현 옮김, 글항아리, 2025년 9월 24일, 교보 전자책
종이책으로 900페이지 정도 된다. 처음 출간 소식을 듣고 구글북스에서 구매하려고 기다리다가 계속 안 나와서 부득이하게 교보에서 구매했다. 교보전자책은 기기간 동기화가 잘 안 된다. 컴퓨터와 BOOX 전자책 리더로 보는 중인데 조금 불편함이 있다.
책은 1권과 2권으로 나눠져 있는데 합본으로 판매된다. 아무래도 요즘 책이 잘 팔리지 않기도 하지만 장르도 인기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책값이 싸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 책을 읽는 용도 뿐만 아니라 소장용으로 구매하지 않을까.
1권까지만 읽고 우선 정리하려고 하는데, 1권은 '바람 아래의 땅'으로 주로 일상생활과 물질문화를 다루고 있다. 물론 대항해시대라는 제목에 걸맞게 17세기 전후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말레이반도 주변의 내용이 대부분이며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등 내륙 지역의 이야기는 매우 빈약하다. 따라서 동남아시아 전체라기 보다는 말레이반도, 폴리네시아, 시암만 정도로 내용을 국한지어서 이해해도 될 것 같다.
동남아에서 오래 거주한 나로써는 이야기 책처럼 쉽게 읽혀지며, 또 내용에 있어서 특별히 논쟁거리가 없기 때문에 인상 깊은 부분들을 나열하고자 한다. 논쟁의 여지가 적은 이유는 작가가 애초에 여러 사료를 통해 비교 검증하고 서술했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동아시아적 사고방식이 부족한 인식의 과정을 따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립적인 고찰이라고 생각된다. 대항해시대 이전의 동남아시아사는 소병국의 동남아시아사를 보면 도움이 되겠다. https://chongdowon.tistory.com/450
[책] 동남아시아사
소병국, 동남아시아, 책과함께, 2020.3, 구글전자동남아시아 국별로 시기별로 정리된 책들은 자주 보인다. 그리고 여행 책자에 보면 간단하게 역사와 문화를 다루기도 한다. 이 책은 1000장이 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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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일부분은 지금도 전해지는데 내가 의아했던 부분이 왜 후추 음식이 다양하지 않을까였다. 최근에는 후추를 염장을 하는 등 다양하게 저장하고 다시 식재료로 이용하는데, 직전까지만 해도 가루 외에는 크게 이용하지 않았다. 육류 보다는 수산물의 소비가 많았고 유럽에서 후추를 각광했던 것과 달리 후추의 용도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또 생선을 이용한 발효장을 더 폭넓게 향신료로 사용했으며, 항상 신선한 물고기와 채소가 있던 환경에서는 냄새를 없애기 위한 후추 보다는 풍미를 끌어 올리는 발효장(어간장)이 더 적절했을 것 같다.
유럽과 달리 물이 깨끗했기 때문에 흐르는 물을 가만히 담아두고 맑아지게 했다는 데서 적정기술의 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탁도가 높지만 오염원은 없어서 항아리에 담아두고 앙금이 가라앉으면서 동시에 자외선으로 소독되면 음용수로 적합했다. 초기 원조사업을 할 때 이런 과정을 이해 못해 지하수를 개발하고 식수를 보급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문제가 생겼다. 특히 메콩강 수계에서 빈번한 비소 문제는 이런 지하수에서 더 심각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행위에 있어서 캄보디아는 여전히 장례식을 치르면 상주에 해당하는 모든 사람은 삭발을 한다. 그리고 주술적 문양이 들어간 문신을 한 남자가 흔하며 우리 생각으로는 군경 공무원은 터부시할 것 같지만 오히려 드러나게 문신을 한 경우도 볼 수 있었다.
동남아시아는 피라미드형 지배구조가 아니라 만달라형으로 넓은 토지에 비해 인구가 부족하여 노동력 확보를 위한 경쟁이 심각했다. 전쟁의 양상 역시 노예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권력에서 조금만 멀어져도 통제가 불가능했다. 전쟁을 하더라도 사망자가 적었던 이유이며 소수의 유럽인이 동남아시아를 상대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잔인무도함에 익숙해서였을 것이다.
흔히 모계중심사회라고 부르는 결과물이 나타는 것은 대항해시대 이전의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이 노예제도, 개항과 맞물리면서 오히려 여성의 지위가 취약해졌을 것 같다. 그럼에도 여전히 농경이 문화적 근간으로 노동력이 중시되므로 모계중심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조건에 부합한다. 근현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자유로운 이혼이나 결혼 생활 역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던 배경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내 경험으로도 남녀간의 위계 보다는 조직 내 권위나 나이나 신분(왕가, 승려 등)에서 뚜렷한 위계를 볼 수 있었다.
1권의 말미에도 서술되어 있지만(본 포스팅 제일 하단)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부족의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말레이반도 지역의 해상무역과 내륙의 인도,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풍성한 문화를 이룩했을지도 모르겠다. 송나라가 내수만으로 충분하여 교역을 거부했듯이 식량이 풍부했던 동남아지역은 유럽문명화 교역이 불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유럽은 향신료와 설탕이 필요해서 총칼로 식민지를 개발하고 노동력을 위해 유럽식의 노예제도를 이 지역에 들여왔다.
결국 식민지라는 것은 착취 혹은 수탈형으로 지역 내 이바지 될 부분이 없었을 것이고 특히 사탕수수를 위한 플랜테이션 농업의 영향은 지금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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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는 언어와 문화가 아주 다양하다고들 하지만, 비슷한 기후적,물리적,상업적 압력을 겪었으며 그 결과 매우 유사한 일련의 물질문화를 발전시켜왔다.
물과 숲은 동남아시아의 자연환경에서 지배적인 요소다. 이 지역은 육로로는 접근하기 어렵지만 물길은 어디나 뚫려 있다.
동남아시아 언어 전체에 나타나는 수많은 공통분모는 활발한 내부 접촉으로 인한 결과
동남아시아 거의 전 지역에 중국과 인도가 심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그 영향력이 정복이나 식민화가 아니라 해상 교역을 통한 것이라는 사실은, 이 지역이 중국과 인도에서 많은 것을 빌려왔음에도 고유한 특수성을 유지해왔음을 일러준다.
1000년경 베트남인은, 몇 세기 후 인구가 급증하면서 자바인과 발리인이 그래야 했듯 동남아시아식 주상 가옥을 더이상 짓지ㅣ 않게 됐을 수도 있다. 주상 가옥을 짓는 데는 나무가 너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비사야 여성들은 셋째 아이를 임신하면 낙태를 해서라도 가족을 소규모로 유지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훨씬 더 중요한 요인은 끊임없이 벌어지는 소규모 전쟁으로 인한 불안정이었다. 이런 종류의 고산지대 쌀은 18세기 베트남 북부에서 중국으로 수출어업은 동남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산업16세기 말 남아메이카에서 고추가 전해올 때까지는 어장과 강황이 '바람 아래' 사람들에게 가장 흔한 '메운' 재료였다. 그러나 고추는 급속하게 퍼져나가... 후추는 전 세계로 파려나갔지만 동남아시아인의 식생활에서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의례로서 고기 먹기) 공급이 제한된 육류를 공동체 전체가 나누는 수단이기도 했다.돼지고기를 삼가는 것이야말로 이슬람교를 수용했다는 최초의 그리고 가장 확실한 신호였다.물을 정화하는 동남아시아식 방법 중 하나는 ...강물을 오랫동안 가만히 담아두고 맑아지게 하는 것이었다.18-19세기 유럽의 절망에 찬 도시 빈민과 달리 동남아시아인은 절대 혼자 술을 마시는 법이 없었다.일상적인 손님맞이는 음식이 아니라 빈랑을 내놓는 것이었다. 섬세하게 마는 것은 여자가 남자에게 해주는 친밀한 행위유럽인이 동남아시아에 가져온 담배는 빈랑의 휴식으로서 기능과 사회적, 의학적 역할을 점차 잠식17세기 동남아시아인의 신장은 유럽인과 거의 같았으나 1800년경 유럽인의 영양 상태가 개선되면서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인도 및 중동과 바다를 통해 접촉한 역사가 거의 1000년에 가까웠으므로 주요 전염병은 대개 동남아시아에 나타났다가 어느 정도 면역을 형성주거용 건축은 비영구적이고 허술했으나 종교적 건축은 영구적이고 튼튼했다.기와는 벽돌보다 훨씬 널리 쓰였다. 야자수 같은 비영구적인 재료를 써서 가옥을 짓는 관행은 시원하고 통풍이 잘되는 것을 선호한데서 비롯한 자연스러운 결과. 상류층만 지붕에 기와문신의 기본 기능은 부적.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일종의 자기 희생. 가장 확실하게 슬픔을 보여주는 방법은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 신체를 마술적 힘의 보고라기 보다는 초월적 영혼을 담은 중립적이고 자연스러운 도구로 보기 시작바느질한 우옷이 뒤늦게 들어온 것은 신쳋 자체가 예술 작품이라는 관념. 오늘날 동남아시라 각국을 대표하는 의상 대부분의 기운이 15세기에서 17세기 사이에 있었던 실험이라고 해도 절대 과장은 아니다.임지는 무한정 널려 있고 노동력은 부족하다는 인식 때문에 경쟁은 기본적으로 인력의 통제권을 놓고 벌어졌다. 전장의 잔인무도함에 익숙했던 것이야말로 그토록 소수였던 유럽인이 수적으로 훨씬 우월한 동남아시아 병력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부연 설명없이 영어의 노예(제)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의 위험성. 동남아시아의 종속 관계 개념에는 노예 대 자유인의 뚜렷한 대립이 담기지 않았지만, 교역의 시대의 조건은 그런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동남아시아의 사회경제체제를 봉건제나 노예제로 보는 것은 옮지 않다. 개인적이고 금전적이었다. 물론 여성이 남성과 완전히 동등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남녀가 직접 경쟁하던 영역은 극소수였다. 동남아시아 여성은 자신에 대한 신부대의 직접 수혜자였다. 결혼한 부부가 남편 쪽 마을보다 아내 쪽 마을에 사는 것이 훨씬 흔했다. 재산은 부부의 공동 소유이며 공동으로 관리곧 과거 동남아시아의 성기 절제술은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남성의 성감을 증진하거나 여성의 성감을 억제할 목적으로 해온 수술과는 목적이 정반대였다.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두드러지는 여성의 자율성이다. 항구도시에서 이런 식의 노예 성매매가 발달한 것은 각기 기대하는 바가 달랐던 유럽인과 중국인의 수요에 븡아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는 무슬림 사이에서 외국인이나 이교도와의 단기혼이 부적절하다는 여론여성의 노동량이 적고 생활이 비교적 안정되어 자녀를 더 많이 둔 것여왕을 왕위에 세우면서 오랑카야 계층은 온화한 통치뿐... 남성은 높은 지위 의식과 전장에서의 명예를 지킬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재산을 낭비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다양한 연근 양식이 자바의 항구에서 자바인 상인들에 의해 믈라카, 파타니로 전해졌고 거기서 달리 말레이 세계 전체로 퍼졌다. 문자는 가정에서 나이 많은 어른이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방식으로 전승된 듯. 애니미즘 문화에 의해 문자 체계가 받아들여졌다. 문자 교육과 전승은 가정의 영역이자 대개 어머니와 손위 자매의 책임이 되었고, 배타적인 사제계급과는 아무 관련 없는 일이었다.문자문화가 성장해 글쓰기가 신성하고 엄숙한 것이 되면서 글을 쓸 수 있는 인구가 줄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역설17세기 중반의 상업혁명은 동남아시아에 끼쳐온 교역의 효과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변화의 속도가 더뎌지고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변화 이전으로 되돌아가면서, 아시아 도시는 쇠토하고 국제 교역에서 뒤처지거나 15-16세기 구축한 많은 것을 19세기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거센 파도가 덮쳐오자 이 나라들은 더 이상 교역의 시대에 그랬듯 침략자들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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